▲이진 (사회문화부 차장)
▲이진 (사회문화부 차장)

 

우리나라는 소수 집단의 의견까지 담아낼 수 있는 다당제를 채택하고 있지만, 사실상 거대 양당이 지배하는 구조의 양당제에 가깝다. 실제로 지난 대선을 돌아보면 한심한 후보라 한탄하지만 더 싫은 후보를 떨어뜨리려 상대 후보를 찍어주는 현상이 일어났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보복이 반복되고 여야 간, 지지층 간 적대감은 높아진다. 유권자들이 심판하고 응징해도 결국은 거대 양당이 주고받으며 같은 행태를 반복한다.

정당은 대의 민주주의 작동을 위한 필수적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목표로 존재해야 한다. 투표의 역설이라는 말이 있다. 단순 다수결을 통한 투표가 구성원의 선호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현상을 뜻한다. 이러한 투표의 역설은 순환적 집단선호를 불러일으키기 충분하다. 즉 우리가 막연하고도 추상적으로 생각하는 효율적이면서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사회적 선택의 가능성이 현실에서 시행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비민주적인 결정 △비합리적인 선호 변경 △정치적인 선호를 변화시켜야 한다. K.Arrow라는 학자는 △개인의 자유보장 △다수의 선호=사회적선호 △기술적 선호 △비독재성 이 네 가지 조건을 충족하며 순환적 집단선호가 없는 것은 어렵다고 주장했다. 그렇기에 사회는 순환적 집단선호를 없애기 위해 독재자가 없는 세상을 포기했고 이에 등장한 것이 정당이라는 조직이다.

정당은 언론과 함께 아젠다 세팅 이론을 바탕으로 대중들에게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은가?”를 일깨워 준다. 이러한 방식으로 자신들이 원하는 결과를 도출해 내고 있다. 대중들의 의사결정에 있어 정당이라는 존재는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 하지만 현 상황을 보면 과연 정당은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조직이 맞는지 의문이 든다. 국민을 위해 존재해야 하지만 집권이 정당의 존재 이유라며 이를 정당화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거대 여야 국민의힘과 민주당은 실체는 다르지만 결국 같은 존재이다. 민주당 같은 경우 조국 사태 이후 표리부동이 노골적으로 표출됐을 뿐 내로남불 모습과 기득권이 아닌 적이 없다. 지난 총선에서 대승을 하고 벼락부자가 돼 감당할 능력이 부족했음에도 그 권한을 행사하느라 좌충우돌한 경향도 크다. 민주당 가치를 지키는 정상적인 정책 추진에 다수 의석을 행사해야 했으며 그 외에는 토크빌의 ‘다수의 독재’를 자제하려는 노력이 없었다. 절대다수 의석을 무기삼아 본인들의 사익을 추구하는 모습은 정당선진화를 퇴화시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더불어 최근에는 자신들에게 불리한 장관 해임 건의안 단독 처리, 고소 고발 등의 모습은 과연 야당이 보여야 되는 모습인지도 의문이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 노력해야 될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정부 흠집 내기, 발목 잡기 등의 행태가 과연 국민이 원하는 것인지 돌이켜봐야 될 것이다. 절대다수 의석으로 날뛰어 1년 반 후 소수당으로 전략하고자 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된다.

여당이 된 국민의힘의 경우 대선 때부터 대선후보와 당대표가 돌이킬 수 없이 갈등하고 민주 절차를 통해 선출된 자들을 바꾸고자 하는 행태는 정치적 술수에 가까워 보였다. 새정부가 출범한지 얼마 안 된 시점에도 내부 혼란은 잠잠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정국 혼란을 더욱 가속화 시키고 있다. 어느 편향된 유튜버가 제기한 의혹만으로 당대표를 징계하고 무리하게 비대위를 출범시켰으며 이에 재판부가 비대위 구성은 무효라는 판결을 내려도 수긍하지 못하는 모습은 이해하기 어렵다. 삼권분립 국가에서 사법부의 판단을 부정하는 것이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인지 묻고 싶다. 이는 권력 앞에서 국익보다는 사익을 추구하는 모습으로 해석될 수 있다. 탄핵정국 이후 끝도 없이 쇄신하고 반성하며 국민들께 기회를 달라고 했던 정당이 다시금 권력을 잡은 후에 모습은 ‘어게인 2016’을 바라는 것처럼 보인다.

권력은 영원하지 않다. 영원한 권력은 독재가 아니고 무엇인가? 끝없이 순환하는 것이 권력이다. 경제학의 아버지 아담 스미스는 개인이 자신의 이익 극대화를 위한 선택을 하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공동체 전체의 이익도 극대화된다고 보았다. 하지만 이때 개인은 이익만 추구하는 이기적 존재가 아니다. 개인은 마음속에 ‘도덕성을 갖춘 중립적 관찰자로서의 자신’을 갖고 있는 도덕적 인간을 가리킨다. 여야 정치인들은 과연 자신의 내부에 ‘도덕성을 갖춘 중립적 관찰자를 갖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하고 싶다. 지긋지긋한 정치 현실을 바꾸려면 정당 스스로 기득권을 포기하고 개혁해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어렵다. 그렇기에 결국 정치는 국민이 나서서 변화를 모색하고 강제해야 한다. 대한민국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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